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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욱_RAUM architects

오신욱은 동아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 건축가 노정민과 건축사사무소 라움을 설립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마스터플랜 현상설계 당선을 비롯해, S1, 청도어린이 도서관, 반쪽집, 아이누리 아트센터, 마로인 사옥, 아트스페이스 라움 등 다수의 작업을 했으며, 2013년 부산신인건축가상을 수상하였다. 타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여 공간실험을 병행하고 있으며 현재 동아대학교 겸임교수이다.

부산의 현대건축사

박: 일본의 경우 동경이나 오사카와 같이 도심지가 아닌, 지방에도 뛰어난 건축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잡지나 미디어를 통해 빈번하게 소개되어 많이 알려집니다. 그런 인프라 혹은 네트워크,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들은 그들에게 아주 좋은 환경이 되는 것 같아요. 반면에 제가 부산, 대구, 광주 일대의, 제 또래 건축가들을 소개시켜 달라고 이야기를 할 때 느끼는 것은, 서울에서는 지역의 건축가들을 잘 모른다는 거예요. 알 수 있는 방법은 공간지 라든지, 전국으로 나가는 잡지 정도를 통해서 혹은 소개를 받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서울에서는 <4.3 그룹>이라고 하는 집단이 뭉쳐 굵직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 이후 세대들에게 없는 그러한 요소들이었죠. 부산을 거점으로 작업하셨던 선배 건축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떤 분들이 계셨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계셨는지.

오: 부산에는 <다시>라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주축을 이루었던 60년대생 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에서 유학을 한 후, 부산에 연고가 있는 대학들에 자리를 잡는 경우와 부산 출신이 ‘공간’에서 실무를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사무실을 연 경우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1997년부터 2000년 사이로 볼 수 있습니다. 부산대, 동아대 출신의 선후배들로 이루어진, 대학교수와 건축사무소장들이 뭉쳐 작품활동을 하거나 건축전을 주최하기도 했죠. 일신설계의 ‘이상건축’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통해 여러 작품들이 모아지게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10명 정도의 그룹, <다시>가 형성되었습니다. 2∼3년 정도 반짝 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개인적인 유대와 친목활동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냈죠. 그 이유는 그 중에서도 잘 되신 분들과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어쨌든 밖에서 본 제 입장에서는 그 분들이 롤모델이었고, 그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저는 우리 젊은 세대들도 그런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이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의 성격은 ‘anti-다시’의 성향을 띄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각의 반대편에서 보는 것이죠. 그 그룹과 우리의 그것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 의 경우 이론공부를 주로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도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론과 비평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다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고요. <다시>의 경우 ‘공간’에서 설계를 주로 하던 사람들이었어요. 우리의 관점에서 그저 설계만 하고 친목도모만 하는 그룹은 의미가 없지 않느냐 라고 생각했어요. 부산을 위해 올바르게 이야기 하고 담론을 만들고, 작품에 대한 조언들도 활발히 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다시>는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임을 꾸려나가기엔 우리는 당시 너무 어렸던 거죠. 1년 정도 카페를 만들고 글을 쓰다가 보니,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사정, 사무소 여건, 건축사 시험 등으로 그룹이 와해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10년 정도가 흘렀어요. 주위의 연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저는 저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어요.

박: 그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시대적 상황인가요?

오: 저는 IMF이후 철없이 사무소를 오픈 했어요. 사실 부산은 서울과 다르게 일이 많이 없어요. IMF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독립하는 사무실이 없었죠. 저희는 부부가 같이 하는 처지라 1년에 하나씩이라도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안되면 예전에 모아두었던 돈을 쓸 생각으로 사무실을 오픈 했어요.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 디자인을 건물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무실을 오픈 해도 6개월 만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결국 혼자서 건축을 하게 되었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다시> 그룹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 같아요.

박: <다시>그룹에서 배우게 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오: 저는 건축가의 길을 사방에 소리치고 외치며 다니던 때가 있었어요. 작업적인 면이라든가 공모전을 했을 때 결과를 공개해 달라는 요청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옛날에 저는 부산에서 잘난 체 하는, 부산시에서 찍힌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시에서도 저를 부르기 시작하고 옳은 목소리를 내달라고 하는 상황이에요. 저로 인해서 이런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부산이 이제는 그 때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을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울이 부러웠어요. 노는 판이 달랐으니까요. 부산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노는 판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기반을 잡은 선배들이 후배 건축가들을 위해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하지만 교훈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해요. 나도 한번 뭉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죠.

박: 제가 아는 분 중에 ‘김승익’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90년대 말에 저를 가르치셨던 분이 강의 차 부산에 가셨는데, 그 때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그리고 강의가 이루어졌던 ‘오름’이라는 건물을 설계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도 혹시 <다시>그룹에 속해 있는 분이십니까?

오: 그분은 몇 년 더 연배가 되십니다. 혼자 작품을 하셨던 분이시고요. 그분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아뜰리에 작업이라는 것을 시작하신 분이기도 하시죠. 50년대 생입니다. 이분은 지금 현재 설계를 안하시고 계시고요.

박: 그렇다면 <다시>그룹에 속해 있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오: '가가건축'의 안용대 소장님, '다음건축'의 김명건 소장님, 카자흐스탄에 계시는 노진석 소장님, 동아대의 김기수 교수님이 계십니다. 김기수 교수님을 주축으로 모인 거라고 말할 수 있죠. ‘공간’ 을 나온 후 교토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셔서 실무를 하려고 하다가 학교로 가셨죠. 그분이 부산에 건축이라는 씨앗을 심어주신 분입니다. 부산은 서울대 건축과 출신 위주의 분위기가 흘러갔는데, 이분이 처음으로 지역대학 출신의 지역건축가들을 위한 흐름을 만들기 시작하셨죠.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하자면, ‘가가건축’의 안용대 소장님은 아뜰리에 작업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직접적인 교류보다는 금전적인 지원을 자주, 많이 해주시죠.(웃음)

박: 그때 그 <다시>의 작업, 작품 성향은 어땠었나요?

오: 모두는 아니지만 ‘공간’의 스타일이 있었어요. ‘공간’이 썼던 어휘, 승효상 건축가가 주로 쓰는 방법들을 조금씩 차용해서 썼죠. 그리고 ‘공간’ 출신이 아닌 분들은 또 그것을 차용해서 쓰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건물에 조금만 디자인이 되면 건축으로서 상당히 튀게 되는 때였으니까요.

박: 그래도 그 당시에는 <다시>가 건축계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거군요?

오: 결과물들이 우리에게 감응을 주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건물에 디자인을 가미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건축적 작품 활동에 대한 전시활동을 주체적으로 했다는 것은 사실이죠.

박: 그렇다면 부산에서 활동하시는, 소장님과 동년배 건축가는 어떤 분이 계십니까?

오: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재민 소장님이 2008년에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프랑스에서 귀국하고 기반을 잡아 나가는 과정이었죠. 그 때 윤재민 소장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이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어떤 사람들은 부산의 투톱이라고 하면 저와 윤재민 소장님이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스스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웃음) 하지만 뼛속까지 부산인 저에 비해, 윤재민 소장님은 타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관점을 견지하고 있죠. 프랑스에서 장기간 유학을 마치고 오셔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뭔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보려고 하시는 것이 보여요. 저는 일상이 부산이고 그래서 이 안에서, 현재의 상황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들이 많고요.

부산의 젊은 건축가

박: 누가 더 낫다 못하다를 떠나서 제가 생각해도 부산만이 가진, 부산에 의한 건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를 위해 소장님께서는 어떤 노력들을 하고 계신가요?

오: 저는 30⋅40대 건축가들이 뭉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해요. 작년에 건축가가 만든 의자 전시(부산건축가회 젊은 건축가 기획전 床)를 하기도 했고 그에 대한 출판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책 내용으로는 도면, 재료, 구조에 대한 여러 비평들이 담겨 있고요. 전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명의 구성원들에게 서로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박: 서울의 경우 빠른 시기에 사무실을 오픈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34에 시작했고요.(웃음) 그런 사무실들이 하는 작업들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요.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부산은 어떤가요?

오: 많이 부추기고 있습니다.(웃음) 제가 부추겨서 한 분들이 8명 정도 됩니다. 사무실을 차리고 난 후에 어떤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안하고, 어쩌면 못하는 그런 시간. 그런 시간들을 어차피 보내야 하는 거라면 '일찍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회사의 실장이나 과장도 하나의 건축가로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있습니다.

박: 서울의 경우, 출신 사무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공간’, ‘정림’ 등의 출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그런 선배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70년대에 와서는 끊겼었죠. 하지만 최근 다시 ‘조민석’, ‘조병수’ 사무실 출신 건축가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하더라고요. 라움도 ‘조민석’, ‘조병수’ 사무실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의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

박: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지역에 있는 건축가들을 잘 모릅니다. 사실은 소개가 많이 안 됐을 뿐이지 많은 것들을 하고 있거든요. 모르다 보니 ‘없다’라고 생각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 ‘공간지’에서, 혹은 기자들이 부산에 오면 제가 부산의 작품들에 대해 소개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잘 모르더라고요.(웃음)

박: 후배들은 어떤 작품들을 하고 있나요?

오: 안기현 소장님과 같이 하시는 이기철이라는 건축가가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김성률 건축가도 그렇고요. 조정훈 소장님의 사무실, 조재득 건축가도 생각이 나네요.

박: 다른 분에게 소개를 받아 박은정 건축가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여자 건축가가 부산에 많이 있나요?

오: 부산에서 여자파워는 대단합니다.(웃음) 여자 건축가가 사무실을 오픈 하면 망하는 경우는 잘 없죠. 부산시에서 하는 프로젝트들에 강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